본문 바로가기

미발표 수필

꿈꾸는 와불 광주드림기사

이메일로 기사보내기 기사프린트하기 기사전체목록 뒤로가기
내 안의 운주사, 우리 안의 운주사

박용수 수필집 《꿈꾸는 와불》

 

기사와 관련된 사진입니다


 

심상했다. 책상 위에 책 한 권이 올려져 있었다. 처음에는 그 책이 어떻게 내게로 왔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별 생각 없이 대강 훑어봤다. 촌스런 디자인에 그저 그런 편집, 직감적으로 읽을만한 책이 아니구나 싶었다. 게다가 수필집이다. 대충 써서 자비로 묶고 글 좀 쓰는 사람인 척 흉내내기 쉽다. 세상엔 그런 책이 많다.

 

 다만 책의 표지가 마음을 끌었다. 운주사 와불 사진이었다. 처음 누워있는 그 불상을 대면했던 오래 전 그 날이 멀지 않게 느껴졌다. 운주사는 마음의 영역이다. 갑자기 임동확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비록 누군가 이미 다녀간,/ 엿보아버린 낙원이었을지라도/ 그리하여 그날의 시체처럼 딱딱하고/ 앙상한 흰 뼈들만 목잘린 석불처럼/ 나뒹굴고 있을지라도/ 우린 잠시나마 그 숲에서 행복했었다> (`기억만으로 행복한-운주사 가는 길5’ 부분)

 

 그렇게 목이 잘려나간 불상을 보고 삶을 위안하던 시절이 있었다. 습관처럼 운주사에 찾아가 나와 같은 처지의 불상이나 석탑을 만나고 잠시 행복했던 그 때, 80년 오월 이후 광주엔 그런 마음으로 운주사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생의 최대 찬사, “천만이 같았던 놈”

 

 박용수<사진>의 수필집 《꿈꾸는 와불》은 그렇게 왔다. 책장을 넘기며 심상함은 긴장으로 변했고, 단숨에 여러 편의 글을 읽었다. 그의 고향이 운주사 근처라는 것도 책의 문장 속에서 알았다. 다 읽고 나서야 약력을 살폈다. 국문학을 전공했고, 지금은 광주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의 글은 유쾌하거나 화려하지 않다. 다만 바닥에서 온다. 그가 살았던 운주사의 글이고, 어머니의 글이고, 자식을 낳지 못하고 비명에 죽었던 큰어머니의 글이다. 딸만 둘을 두었던 외할머니의 글이기도 하다. 낮게 살아서 마음에 닿는 문장, 그것이 박용수의 수필이었다. 그의 글은 또 굳이 하나의 장르로 묶일 까닭이 없다. 어느 구절은 소설이고, 또 어디에서는 시의 문장이 번뜩인다.

 

 <운주사 입구에는 그를 닮은 탑이 하나 있다. 송장탑이라고도 하고 거지탑이라고도 한다. 천만이의 육신을 닮았다. 어떤 모자란 석공 하나가 어느 석공이 깎다 버린 탑신과 옥개를 주워 모아 아무도 눈에 띄지 않는 이곳에 슬그머니 쌓았으리라. 나는 그 탑 앞에 서면 그토록 아름답고 순수한 그의 영혼과 만난다. 평생, 탁발 수행했고, 평생, 그 걸레 같은 육신을 이끌고 고행하면서 갈고 닦았던 아름다운 영혼을 본다.>

 

 `천만’이는 중장터 인근에 살았던 거지다. 천형을 받아 송장과 같은 육신을 지녔다. 아이들은 천만이를 만나면 도망 다녔다. 하지만 천만이의 삶은 아름다웠다. 그는 일정 날짜가 지나지 않으면 설사 굶을 지라도 같은 집을 다시 찾는 법이 없는 거지였다. 불편한 몸으로 비를 맞으며 남의 나락을 보호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 “천만이 같았던 놈”은 일생의 최대 찬사일 수 있다.

 

 

 

“큰딸이 보냈그만 한 잔씩 허드라고잉”

 

 그의 외할머니는 딸만 둘을 낳았다. 남편은 일찍 죽었다. 두 딸을 시집보내고 외할머니는 육십 평생을 혼자 살았다. 그는 명절이면 몇 십 리 길을 걸어서 어머니의 심부름을 했다. 외할머니에게 소주 `됫병’ 하나를 전달하는 일이었다. 먼 길을 감안하면 소주 됫병의 무게는 아이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아이가 조금 크고 나서 알았다. 외할머니 동네에도 가게가 있었고, 똑같은 소주를 판다. 왜 어머니는 알면서도 자식을 수고롭게 했을까. 커다란 됫병은 곧 외할머니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손자가 배달해온 소주를 들고 외할머니는 유달리 목소리가 컸다. “큰딸이 먼 곳에서 일부러 보낸 것이여, 한 잔씩 허드라고잉.”

 

 박용수가 만들어낸 이야기는 진실하다. 운주사 근처 하루 한 번 흙먼지를 일으키며 오가는 금성여객, 포플러 길게 늘어선 신작로, 그 길로 쟁기를 지고 가신 아버지, 모두 삶의 깊이를 넓게 후빈다. 그리고 알게 된다. 운주사의 부처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천만이도 너도 나도 모두 자기 안에 부처를 담고 있다.

 

  정상철 기자 dreams@gjdream.com

기사 게재일 : 2007-06-13

'미발표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토담처럼  (0) 2006.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