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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수필

나무의 사랑

 

                         


                           나무의 사랑

                                                             박 용 수




  나무가 있습니다. 깊은 산 속에 키 작은 나무가 있습니다. 지금 저는 그 나무 앞에 서 있습니다. 나무를 바라봅니다. 나무도 나를 봅니다. 내가 멋쩍은지 나무는 잎을 흔들어 긁적입니다. 낯선 사내가 부끄러운 모양입니다.  

나무에 슬며시 몸을 기댑니다. 기다렸다는 듯 나무는 어깨를 내어 줍니다. 나무의 따뜻한 온기가 전해옵니다. 나무의 수액이 내 몸 속으로 흘러듭니다. 나도 수액이 흐르는 나무이고 싶습니다. 나무처럼 짙푸르고 나무처럼 단단하고 싶습니다.

나무, 지금까지 나는 어떤 나무였을까. 깊은 산 속에서도 자존을 지킨 고고한 신갈나무였을까, 길가의 키 작고 속 좁은 도토리였을까요. 여인네의 속살처럼 하얀 자작나무였을까, 몸에 가시가 돋친 탱자나무였을까요. 잡목 속에서도 잘 자라는 떡갈나무였을까, 누구의 접근도 경계한 채, 안으로만 단단해진 박달나무였을까요.

어쩌면 나무와 견주는 것조차 부끄러운 삶이지 싶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나무가 되고 싶습니다. 어른들에게는 그늘을, 아이들에게는 등을 내어주는 느티나무가 되고 싶습니다. 농부가 막걸리를 마시는 동안 소를 붙잡고 있는 소태나무거나 쌀알처럼 하얀 이팝나무고 싶습니다. 돌담을 온통 노랗게 수놓는 산수유이고도 싶고, 깨끗한 물만 마신다는 깊은 산속 고로쇠이고도 싶습니다. 여름이면 무성한 잔가지를 자랑하며 울어대는 마을 뒷산 산죽이고 싶고, 가을이면 온몸에 붉은 단장을 하는 황칠이고 싶습니다. 눈보라 속에서도 속내를 드러내는 법이 없는 갈매나무이고도 싶습니다.

뒤란 장독대 옆에서 단란한 가정의 웃음소리를 엿듣는 늙은 감나무여도 좋겠고, 독한 향기로 나그네를 붙잡는 아카시아여도 좋겠습니다. 돌 틈에서도 탐스런 꽃을 피우는 버들강아지이고도 좋겠고, 진한 향기로 들판을 가득 메우는 찔레여도 좋겠습니다. 바닷가 소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엿듣는 슬픈 동백이어도 좋겠고, 새색시의 치맛자락같이 화사하게 산을 물들이는 산벚이어도 괜찮습니다.


깊은 산 속, 오두막이 있었습니다. 거기, 가난한 노부부가 살았지요. 할아버지가 밭을 일구면 할머니는 호미로 메었답니다. 할머니가 삭정이를 꺾으면 할아버지는 글거리를 모았지요. 할아버지는 장작을 패고 할머니는 숯을 구웠답니다.

어느 추운 겨울, 몹시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할머니는 비명소리를 들었답니다. 읍내를 다녀오던 할아버지가 발을 헛디뎌 벼랑에서 떨어지고 말았지요. 허겁지겁 달려간 할머니 앞에 할아버지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집안으로 할아버지를 모신 할머니는 서둘러 집을 나섰지요. 약재를 찾아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간 것이지요.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도 할머니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기다림에 지친 할아버지는 그만 의식을 잃고 말았답니다.

할아버지가 눈을 떴을 때, 할머니는 곱게 웃으시며 할아버지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손을 꼭 붙잡고서 할아버지만 보고계신 것이지요. 약으로 쓰였을 나무껍질이 머리맡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답니다.

할아버지는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났답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할아버지는 밭을 갈고 할머니는 나무를 했답니다. 그때 면사무소 산림계 직원이 나타났지요. 등에 총을 멘 경찰관을 대동하고 말이지요. 나뭇단을 가리키며 그들은 할머니를 막무가내 잡아가려 했습니다. 할아버지가 가로막아 섰지요.

할아버지가 떠난 뒤, 할머니는 혼자가 되었답니다. 밤낮으로 치성을 드렸지요. 산신령은 물론 나무신령 바람신령에게도 드렸답니다.

눈이 오고, 다시 봄이 온 이듬해, 산림계 직원과 경찰관이 찾아왔답니다. 직원의 손에 보자기로 싼 상자가 들려있었지요.  

보자기를 받아든 할머니는 나무 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한 줌, 한 줌 나무 밑에 뿌렸습니다. 그 때 바람이 불었습니다. 송홧가루처럼 할아버지의 육신이 온 숲을 덮었습니다. 숲에서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니 숲이 울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울음소리였지요. 그 날 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 뒤, 오두막에 할머니의 모습을 영영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날 이후, 바람이 불면 나무가 울었습니다. 할머니의 헝클어진 머리카락 같은 잎을 흔들며 밤새도록 피멍이 들도록 울었습니다. 나무가 울면 산도 계곡도 함께 울었습니다. 숲이 우는 소리는 할머니를 찾는 할아버지 목소리 같기도 하고 할아버지의 혼을 부르는 할머니의 소리 같기도 했습니다.


나무를 닮고 싶습니다. 나무껍질같이 단단한 피부, 옹이처럼 괭이가 박힌 손, 부채처럼 가지를 펼친 팔. 그런 나무가 되고 싶습니다. 몸은 줄기이고 가지는 팔인 채,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깊은 산 속 키 작은 나무이고 싶습니다.

나무이고 싶습니다. 죽어서도 제 몫을 다하는 나무이고 싶습니다. 다슬기를 까먹을 때 쓰는 가시를 가진 탱자나무고도 싶고, 주막을 나오는 나그네의 손에 잡힌 이쑤시개고도 싶습니다. 한평생 곱게 삶을 마감한 노인의 아늑한 관이고도 싶습니다.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튼튼한 마루의 널빤지이고도 싶고, 깊은 산 속 오두막의 기둥이고 싶습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랑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그런 나무이고 싶습니다. <수필세계 2006년 겨울호>

* 전남일보 신춘문예 <아버지의 배코> 당선

* 광주문인협회, 무등수필문학회 회원

* 광주동신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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