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수정 연가 |
| 입력시간 : 2016. 10.19. 00:00 |
무등산 둘레길 들머리, 풍광 수려한 산음동 독수정(獨守亭)이 녹음에 잠겨있다. 시원한 물소리와 말매미의 고성방가, 산안개 그윽한 가파른 굽이길. 독수정 오르는 길은 나무목자로 어깨를 걸치고 열십자로 가지를 펼친 나무들이 절창을 하고 있다. 우람한 원목들이 높이를 뽐내는 원림, 독수정에 오르는데, 어인 일인지 등 뒤쪽 소쇄원은 사람으로 요란하고, 여기 독수정이 되레 소쇄하다.
매미 울음을 헤치고 원림 속으로 들어간다. 굽이굽이 가풀막을 막 오르자 눈에 들어온 숲속의 궁전, 독수정이다. 패망한 고려를 홀로라도 지키겠다는 장수의 결기가 느껴질 만큼 작지만 옹골찬 위용. 독수정 마루 위에 무언가 나풀거린다. 누굴까. 사랑놀이에 흠뻑 빠진 다람쥐 한쌍을 피해 살금살금 다가가는데, 댓돌 위에 덩그마니 등산화 두 켤레. 낡았지만 가지런하다.
늙수그레한 남녀가 곤히 취해있다. 처마 끝 서까래에는 목화송이 같은 구름이 무덕무덕 피어나고, 남녀의 숨소리가 새근새근 깊은데, 매미의 울음이 맵차다. 하산하는 길일까. 아니면 규봉을 향해 오르는 길목일까. 길 잃은 신선이 잠시 여기 수면에 빠진 것일 게다.
내 작은 발자국소리에 눈을 뜬 아낙, 새벽에 서울서 왔단다. 제주도 올레길 다음으로 택한 길이란다. 가벼운 행장, 강파란 몸매, 환갑을 넘었을까 아니면 그 즈음 일까. 반백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청거린다. 이마의 잔주름이 계곡처럼 깊다. 무척이나 자연을 닮은 얼굴. 늙어서도 아름다운 것이 사람이구나. 사람과 정자, 오래되어도 아름답구나. 독수정에서 사색은 하늘만큼이나 깊고 푸르다.
문학소녀였단다. 사미인곡의 한 구절을 멋들어지게 읊는다. 옛 추억을 더듬어 오기에 맞춤이었단다.
"백두산, 설악산, 지리산 곳곳이 봉우리요 계곡 아닙니까. 허나 멋진 시를 품고 있는 산은 무등 말고 어디 있습니까. 무등이 곧 무릉이지요."
어디 계곡 없고 봉우리 없는 산이 있겠는가마는 인간미 넘치는 시와 노래가 있는 곳을 찾다보니 이곳이었단다. 젊어서는 봉우리를 찾아 헤맸는데 거기엔 사람이 살지 않더라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으니 절로, 낮은 곳을 찾게 되고 거기 옹기종기 풀꽃들이 피어있고 그 속에 사람들이 살더란다.
부부인줄 알았다. 중학교 때 짝으로 만난 첫사랑이었는데, 어쩌다 서로 각기 살았단다. 바짝 다가온 저승길, 지금부터는 동반하기로 했다며, 손을 꼭 잡고 사라지는 두 남녀의 꿈이 산음동 능선을 지나 신선대로 이어져 있다.
다시 불어오는 매미 울음소리. 나무들이 수많은 이파리를 흔들어 말매미의 낭창한 노래들을 계곡 건너편으로 부지런히 퍼트리는 햇살 짱짱한 원림의 맹하.
그들이 피로를 털고 간 마루에 나도 가만히 몸을 눕힌다. 장송 사이로 펼쳐진 쪽빛 하늘, 어쩌면 망망대해가 아닐까. 코발트빛 물결과 새하얀 구름이 만들어낸 하얀 물거품. 어찌 이런 비경에서 독수를 품을 수 있단 말인가. 싸우다 죽든지 자결을 하든지 그 어떤 선택도 하지 못했던 사내의 번민, 그리고 몽니를 부리듯 독수를 결의하기까지 한 사내의 슬픔을 아는지 하늘도 날을 시퍼렇게 세우고 있다.
북쪽을 향해 곡배를 할 때마다 또 얼마나 아팠을까. 모진 마음일지라도 무장해제 시킬 것 같은 이 수려한 공간이 아니고서 어찌 망국의 한을 잊을 수 있으며, 마음의 상처를 다스릴 수 있었으랴. 그의 시퍼런 결기가 저리 푸르게 나뭇잎으로 돋아난 것인가. 이 숨 막히는 절경 속에서 음풍농월하기보다 망국의 한을 곱씹었어야 했을 그도 낙원 속에서 낙원에 이르지 못했을 것 같다.
반생을 각기 살다가 기어코 다시 만난 두 남녀의 결합이 어찌 독수 없이 이루어질 사랑인가. 미움도 독수에서 생겨나고, 사랑도 독수에서 피어나는구나.
독수정에서는 사색도 혼자 해야 하고 통찰도 홀로 해야 한다. 그때보다 더 혼탁한 오늘, 지조와 절개는커녕 철학과 신념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살아가는 가볍고 천박한 시대, 나는 누구이고 내가 가야할 길은 또 어디인가. 지금껏 독수하며 살아온 것이 무엇이었고, 앞으로 독수해야할 것은 또 무엇인가.
하산 길에는 마음을 가다듬고 내면세계의 결기를 다지는 정자 하나 마음속에 지어야겠다. 힘겨운 시대를 헤쳐 나갈 확고한 지향점을 가지고 살아간, 신념 또렷이 간직한 사내 하나 내 안에 들여야겠다.
정자 옆 호두나무에서 날다람쥐 한쌍, 유심히 나를 지켜보고 있다.
박용수 광주 동신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