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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수필

화순 도암의 의병과 빨치산

마을과 인간을 읽다

암울한 시대 버티게 한 민족애 마을 곳곳에 배었다

입력 2023.10.10. 18:23양기생 기자
 
[마을과 인간을 읽다] ⑩화순 도암면·끝
화순 도암면 도장리 마을 사람들은 암울한 시대에도 의연하고 꿋꿋하게 서로 사랑하며 역사의 장애물을 극복했다. 지금까지도 이웃과 민족을 향한 사랑이 마을 곳곳에서 느껴진다. 사진은 마을 내 정자 모습. 

[마을과 인간을 읽다] ⑩화순 도암면·끝

어느 마을에 가면 가슴 설레는 곳이 있다.

화순 도암, 도장마을이다. 무딘 심장은 지뢰 탐지기처럼 예민해지고 걸음이 빨라지는 곳, 마을 앞으로 맑은 시내가 흐르고, 오래된 나무가 반기는 곳, 마을을 감싼 절벽에 벽파정, 굽이굽이 물빛 푸른 도장(道莊) 마을.

길 언덕에 오래된 예쁜 교회가 있고, 첫눈이 하얗게 그 교회 지붕을 덮은 곳, 첫사랑을 밟듯 사뿐사뿐 여기 도장리에 왔었다. 소풍은 운주사(運舟寺)로만 갔던 탓에, 불교가 모두의 종교였던 시절, 마을에서 시오리 떨어진 이곳을 걸어 걸어왔었다.

누군 선물을 준다기에, 누군 맛있는 걸 준다는 말에 왔지만 나는 아니다. 고백건대 풍금 소리를 듣기 위해 왔고 친구를 보러 왔다.

그래서 다들 눈을 감고 기도하는 때, 고개를 빼꼼 들고 미어캣처럼 그 친구를 찾았다. 남녀가 좌우로 나뉘어 예배를 보던 시절이었다. 그 친구도 고개를 숙여서인지 찾을 수 없었다. 성탄절 예배당은 만원이었다.

의인 나순례 여사 공덕비

반백 년 전의 추억을 떠올리며 도장리로 들어선다. 그 예쁜 아이들이 고무줄놀이하고 비석 치기와 술래잡기를 했을 고샅. 여기저기 기웃거릴 때마다 아이들이 방싯 웃고 나올 것 같은 마을.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다. 초등학교 어느 땐가, 그 순진한 아이가, 세상 물정 모른 아이가 유독 사랑만은 조숙했다면 그건 순전 이 마을 때문이다.

밭 노래로 잘 알려진 마을이다. 두세 분만 모여도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시는 아낙네들이다.

콩밭에서 목화밭에서 서숙 밭에서 호미질하며 삶의 애환을 노래로 달랬던 사람들. 논에서는 남정네들이 피를 뽑으며 구성지게 선창하면, 낭랑하게 밭에서 아낙네들이 화답했다. 돌이켜보면 가난했지만 흥겹고 정겨웠던 시절이었다.

입구에 항일애국지사 충혼탑이 있다. 1910년대에 대한광복단에 가담해 싸웠던 김영하 선생과 경향의사단을 조직해 독립을 위해 애썼던 김용상 선생이 이 마을 출신이다.

'해석 김용상(1858~1919)은 경서에 통달한 학자로서 을사늑약 후 상경해 독립자금을 모으는 등 활동하다 1914년 러시아 국경에서 일경에게 체포돼 혹독한 고문 끝에 1919년 사망했다.

애국지사 김용상 김영하 추모탑

광복단 단원인 그의 조카 김영하(1878~1920)는 1917년 나주, 함평 등지에서 독립군자금을 모금해 해외 독립운동가들에게 조달했다.

그는 1918년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대구법원에서 10년 형을 선고받고 옥사했다.

도장리 마을 뒤 도포 배미에는 6·25 한국전쟁 전후 도암면 민간인 희생자 추모탑이 자리하고 있고, 그 왼쪽으로는 의인 나순례 공덕비가 있다. 백아산과 화학산 줄기인 도암 역시 좌우 대립이 심했던 곳이다.

1951년 3월 중순, 곤한 잠에 취한 미명이었다. 11사단 3대대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도포 배미로 집합시켰다.

명분은 빨치산 토벌이었다.

갑자기 기관총이 불을 뿜었고 마을 사람 20여 명이 쓰러졌다. 견벽청야(堅壁淸野), 그 절체절명의 순간, 어린아이를 등에 업은 한 여인이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덥석 대장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아무 죄도 없어라, 목심보다 중한 것이 어디 있다요, 제발 살려주시오" 울고불고 통사정했다.

짧은 순간의 침묵이 흘렀다. 누구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 후, 여기저기서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군인들도 동요하기 시작했고, 대장도 주위를 살폈다.

도장리 마을 보

그렇게 학살이 중단됐다. 그 여인이 바로 회진댁이다. 70여 년이 지난 당시 상황에서 목숨을 구한 사람이나 그 광경을 지켜봤던 사람들 다수가 나순례 여사의 용기와 인간애를 또렷이 기억했다.

해망산은 도장마을 뒷산 이름이다. 해망(海望), 바다라기보다 넓은 곳, 도곡평야 또는 희망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그 정기 덕분인가. 암울한 시대였지만 유독 마을 사람들은 의연하고 꿋꿋하게 역사의 장애물을 극복하며 서로 사랑하며 살아왔다.

그들의 사랑은 어떤 이념이나 증오, 어떤 총칼로도 이길 수 없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설을 통해 룰루 밀러는 분류학의 오류, 우성학의 모순에 대해 통렬히 비판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좌익이나 우익이라는 언어는 일단 이름을 붙이고 나면 더 이상 그 대상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게 된다는 사실이다. 일종의 '언어적 거세'다.

난해한 복수극 같았던 해방 전후 우리 역사 역시 커다란 편 가르기였다.

그러나 그건 밀러의 말처럼 '모든 자(ruler) 뒤에는 지배자(Ruler)가 있음을 기억하고, 하나의 범주란 잘 봐주면 하나의 대용물이고 최악일 때는 족쇄'일 뿐이다. 대저 이념이 무엇인가. 편협한 허상에 매몰되거나 시대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욕망은 사랑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한 사상은 사랑의 이름을 가장한 가장 천박하고 비루한 폭력일 뿐이다. 인간보다 앞선 이념이나 사상은 없다. 나를 뛰어넘고 이웃과 민족, 그리고 지구상의 다른 생명을 향할 때 관념과 사상은 진정한 사랑이 된다.

도암에는 마을마다 과거 어두운 역사를 파헤치고 진실을 밝히려는 지역 사람들이 있다.

민판기, 박길성, 김성인, 형광석, 홍기춘씨다. 김성인, 형광석씨는 도장리 출신으로 죽마고우다. 김성인(66)씨는 유신시대부터 농민운동을 한 행동하는 농민 활동가이자 향토 사학자다.

마을의 전통 밭 노래를 발굴하는 것에서부터 2004년 도암 역사문화 연구회를 발족해 지역 문화 발굴에 앞장서고 있다. 송홍, 김영하 선생 등 주변의 독립운동가와 기타 해방 전후 지역 좌익과 경찰이 주민들에게 가한 폭력을 찾아내는 등 올바른 역사 복원에 힘쓰고 있다.

사람에 대한 평가 기준도 많이 달라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쥐꼬리보다 못할지라도 벼슬이나 관직을 으뜸으로 쳤다. 요즘은 어느 회사 사장이나 대표이사 정도 돼야 허리를 굽힌다. 시류에 따라 우린 이토록 기회적으로 살았다.

앞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은 관직에 눈멀고 제 밥벌이에 급급한 그런 부류보다 의로운 삶을 살며, 지향할 가치, 지표를 알려주고 성큼성큼 앞서간 사람, 시대를 꿰뚫어 보는 안목을 지닌 사람이다. 그런 이가 진정 이 시대 어른이다.

누군 이 마을에서 손톱 같은 사랑을 간직했고, 누구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쳐 위대한 사랑을 실천했다.

그리고 또 누구는 지금 지난 역사를 찾아 바로 세우는 커다란 사랑을 키우고 실천하고 있다.

도장의 별칭은 도량(道場)이다. 어쩌면 이런 삶의 질곡들, 차별과 증오와 분노를 모두 끌어안고 천년만년 천태산을 부처 삼아 마을은 가부좌를 틀고 도량을 닦고 있는지 모른다.

도장리와 김성인씨

작은 마을인 줄 알았다. 그런데 엄청나게 큰 마을이었다. 마을은 주민 수로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을 도장리 마을에서 배운다.

마을 앞의 냇가에서 아이들이 물장구치고 다슬기를 잡고 있다. 그때 그 예뻤던 소녀들은 각지로 흩어져 돌아올 줄 모른다. 냇가에서 빨래하던 유난히 키가 큰 아이, 이름이 같았던 정희와 영남이, 그들은 지금 어디서 나처럼 늙어갈까.

첫사랑 그 소녀는 / 어디에서 / 나처럼 늙~어갈까 // 가버린 세월이 / 서글퍼지는 / 슬픈 뱃고동 소릴 / 들어보~렴

혼자 흥얼거리며 마을 앞, 조개 바위를 빠져나온다. 여러 개의 사랑이 실개천을 따라 윤슬처럼 반짝이며 흘러가고 있다. 박용수 시민전문기자

 

박용수는 화순 운주사가 있는 곳에서 태어났다. 전남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줄곧 수필 쓰기만 고집해 왔다. ‘아버지의 배코’로 등단하여, 광주문학상, 화순문학상, 광주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하였다. 광주동신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며, 작품으로 꿈꾸는 와불, 사팔뜨기의 사랑, 나를 사랑할 시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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