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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수필

섬진강의 봄

섬진강의 봄-박용수 광주동신고 교사·수필가
2022년 03월 06일(일) 22:10

 

 

그리운 건 겨울이 춥고 길어서일 게다. 마을 앞 냇가에서 더 이상 썰매를 탈 수 없이 봇물이 불어 오르면 봄이 바짝 다가왔음을 알았다.

우린 마을별로 줄을 지어 보리를 밟았다. 보리를 힘차게 밟을 때마다 고무신 발바닥이 간지러웠고, 보리가 짓뭉개졌을까 뒤돌아보면 우리가 지나간 뿌연 흙먼지 너머로 파릇파릇 봄이 오고 있었다.

더 자라서는 음지의 얼음이 깨질 즈음, 두엄 냄새와 함께 봄이 왔다. 거북하면서 결코 싫지 않은 냄새, 꽁꽁 얼었던 두엄이 풀리면서 할아버지나 아버지 냄새 같은 거름 냄새를 따라 살랑살랑 춘풍과 함께 왔다.

사춘기에 봄은 엉뚱한 곳에서 왔다. 여느 봄과 달리 밖에서 오지 않고, 놀랍게도 내 가슴 안에 있었다. 가장 뜨겁고 가장 길었던 봄이었다. 봄은 새싹처럼 쑥쑥 턱수염을 올렸고, 연분홍 여드름을 봄꽃처럼 점점이 이마 위로 피워 냈다. 사랑해서 아픈 봄이었다.

가장 힘든 봄도 있었다. 그해 5월, 그해 봄은 유난히 길었고 지루했고 눈물겨웠다. 기다려도 오고 기다리지 않아도 온다는 어느 시인의 시구도, 모란이 피기까지 기다리겠다는 시구도 모두 거짓말이었다. 그해는 꽃이 피지 않은 해였다. 교실에도 강의실에도 고샅에도 없었고 너릿재나 도동고개에도 봄은 오지 않았다. 스무 살 무렵이었다.

그 뒤 또 20년이 흐르고 또다시 세 번째 20년이 흘렀다. 예전 봄이 가끔 오는 손님 같은 봄이었다면, 지금은 기다리고 또 기다린 임 같은 봄이 되었다.

내 머리카락도 매화를 닮아 이제는 하얗게 백발로 만발한 지금, 한 갑자 봄, 흰 머리카락은 봄의 DNA를 기억해 두었다가 나를 유년 시절 시냇가로 이끈다. 그러면 서둘러 임이 오는 길로 마중을 나선다.

그녀는 꼭 저 아래 광양에서부터 은어의 푸른 등을 타고 온다. 차가운 지리산의 언 강물을 꼬리를 부수며 힘차게 거슬러 오면 내 온몸도 근질근질해진다. 봄은 섬진강으로 올라온다. 바다도 뱃길이 있고, 비행기도 하늘길이 있듯 춘풍의 길이 있다면 그건 섬진강이다.

섬진강 윤슬 위로 봄이 제일 먼저 온다. 아니 가장 멋지게 온다. 봄이 되면 섬진강 강물은 와글와글 수많은 두꺼비들의 울음소리를 낸다. 왜적을 물리치겠다는 그 우렁우렁한 봄 두꺼비 울음소리는 겨울을 밀어내며 봄이 오는 소리다.

봄이 온다고 모두 다 봄이 아니다. 아버지의 바짓가랑이 같은 섬진강으로 오는 봄이 진짜 봄이다. 간혹 거제나 부산에서 화신이 먼저 도착했다고들 아우성이나 그곳은 애당초 물러나지 않은 봄, 텃새처럼 웅크린 묵은 봄이다. 남녘 광양에서 섬진강을 따라 올라 온 봄이야말로 진짜 새봄이다.

저 멀리 시베리아까지 세 계절은 넉넉히 물러났다가 때가 되면 철새처럼 와야 봄이다. 광양이라는 이름처럼 봄 햇살로 와서 다압에서 매화꽃 강물 위로 몇 송이 흘려보내고 지리산과 보성강 강물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문척에서 겨우내 잠든 참게를 깨우며 달포 가량 머물고, 고달에서 뱃놀이 좀 하다가 청계에서 또 사나흘 쉬었다가 그렇게 해찰 좀 하면서 게으름과 거드름 좀 피우며 느릿느릿 왔다가 광주를 지나 순창 임실부터 서울까지 당차게 올라가야 한다.

그렇게 올라오면서 매화를 피우고 진달래로 산천을 수놓으면서 얼었던 이들의 마음을 녹이며 올라오는 섬진강 봄이 진짜 봄이다.

어린아이들 머리에 꽂을 꽃으로 오고, 시골 노인네들도 삼삼오오 모여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고 흥얼거리도록 온다. 봄은 땅을 뚫고 오고, 물속으로 오고 바람을 타고 온다. 어느 문턱이고 어느 집 앞마당에 파란 호박이나 오이 새순으로 오고, 시골 노인네의 해맑게 웃는 주름 사이로, 빠진 이 틈새로 오고, 부지런히 퇴비를 뿌리는 농민들의 소쿠리에서 온다. 노란 병아리의 뾰쪽한 울음소리로 오고, 빨랫줄에 널린 이불 사이로도 온다.

섬진강으로 오는 봄이야말로 진짜 봄이고, 마법 같은 봄이다. 그러니 어찌 바쁘다고 나물 바구니 챙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광주일보 수필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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