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기적이 울린다. 귀를 쫑긋 세운다. 내려올까 올라갈까. 누가 타고 있을까. 몇 칸쯤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면 기차의 울림이 내 심장 두근거림과 화음을 이뤄 절로 나를 먼 곳으로 데려간다. 기차가 지축을 흔들면 내 발은 근질근질해지고 마음은 어느새 두근거린다. 누구 또 내 심안의 역마살을 건드리는가 보다. 난 눈만 감고 이미 승차해서 차창을 바라보며 신나게 여행 중이다.
아직도 은소금 하얀 햇살 속에 서 있겠지/ 서울 가는 상행선 기차 앞에/ 차창을 두드릴 듯/ 나의 아버지/ 저녁노을 목에 감고/ 벚나무들 슬픔처럼 흰 꽃 터뜨리겠지/ 지상의 기차는 지금 막 떠나려 하겠지// 아버지와 나 마지막 헤어진 간이역/ 눈앞에 빙판길/ 미리 알고/ 봉황새 울어 주던 그날/ 거기 그대로 내 어린 날/ 눈 시리게 서 있겠지.-문정희 作 '명봉역'
간이역을 가려면 보성 명봉역 정도는 돼야 한다. 석탄을 실은 삼탄역이나 영벽정 푸른 능주역도 좋지만 적어도 기차가 도착하면 봉황의 청청한 울음소리 정도는 들려야 역다운 맛이 난다. 그래서 명봉역은 누구나 시심 가득 품고 오가는 곳, 누구나 이곳에서는 시인이 되고 문정희가 된다.
명봉역은 봄에 가야 한다. 조그만 역을 온통 뒤덮은 벚꽃이 만발한 명봉은 역이라기보다 정원이고 정원이라기보다 지상에 천국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기차를 타면 꼭 분분한 낙화 속에서 봉황의 날갯짓을 따라 천상으로 올라갈 것처럼 마음이 둥둥거린다.
봄날 벚꽃 휘날리는 달밤에 봉황 울음소리를 들어야 역이고 그 역이 바로 명봉역이다. 어디 봉황이 상상 속의 새가 아니겠는가마는 봉동마을의 수컷 봉황과 봉화마을 암컷 봉황이 노동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 바라보고 있는 골짜기, 거기에 살을 붙이고 사는 이들이 봉황은 아니었을까. 하루에도 수십 번 오가는 기차가 혹 그 봉황은 아니었을까.
아쉽게도 지금은 하루 두어 차례 지날 뿐 여간 운이 좋지 않고는 기차를 만나기 어려워졌다. 상·하행선 철로는 여기저기 녹이 슬었고, 간이역엔 손님을 반갑게 맞아주던 역원도 역장도 없다. 화무십일홍을 무색하게 했던 역 앞을 장식했던 우람했던 벚나무도 노인들처럼 허리를 굽힌 채 서 있고, 텅 빈 역사에는 옛날의 영화를 자랑하는 사진 몇 장과 오래된 카메라 소품이 애써 옛날을 호명하고 있는 듯했다.
학동 호미 마을 입구에서 만난 농부에게 시인의 집을 물었다.
"시가 뭐야? 오줌 쌀 때 쉬! 쉬!"
장난인 줄 알았는데 진짜 농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둘러 논으로 나간다.
그렇게 농부가 떠난 회관 옆 작은 정자. 잠시 적막과 고요가 자리한 고샅에 노인 한 분이 비료를 싣고 내려온다. 문정희 시인 집을 묻는 말에 어르신은 활짝 웃으며 서둘러 지게를 내려놓는다.
"아따 우리 아랫집에 산 동생이제, 나보담 서너 살 적게 묵었어, 그때는 오빠 동생 하믄서 좋게 살았제."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조순형(83) 씨다. 그때는 어느 집이나 베를 짰는데 삼베가 떨어지면 서로 이어주고 팔아주면서 살았다. 회관을 지을 때도 시인의 오빠가 큰돈을 기부했고 작년엔가 어디 지나는 길에 들려서 회관에 놀고 있는 분들에게 막걸리 사서 먹으라며 용돈을 주고 갔다며 얼마나 바빴는지 회관 앞 비석에 새긴 자기 이름도 확인하지 못하고 갔다며 아쉬워한다.
어르신은 말이 고팠는지 아니면 사람이 고팠는지 모를 정도로 말을 술술 쏟아냈다. 어쩜 시골 마을에서는 말을 할 사람도 없지만 들어줄 사람은 더욱 없다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명봉역 입구와 문정희 시비
학동리는 5개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호미는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는 마을이고, 갑동은 예전엔 죽뱅이라고 했다. 죽만 먹고 사는 마을이라고 해서 듣기 흉하니 지금은 갑동으로 부른다. 예전엔 3천333가구가 산 엄청나게 큰 마을인데 중이 시주를 자주 오니 마을 청년들이 시주보따리를 빼앗으며 장난을 쳤단다.
스님이 재치 있게 어디에 가면 좋은 돌이 있는데 쪼개면 황금이 나오니 내 시주보따리를 주고 그 황금 돌덩이를 가져가라고 했다. 청년들은 스님의 말을 듣고 그곳에 가보니 정말 좋은 돌이 있어서 힘껏 그 돌을 쪼갰더니 피가 줄줄 나오더란다. 그 후 마을은 망해버리고 지금은 두어 가구만 산다고 한다. 권선징악의 선행을 권하는 장자 못 설화가 이 마을에도 변형돼 남아있다.
요즘은 기차 보기가 힘들단다. "왜 기차가 안 댕기겄어, 사람이 있어야 댕기제."
기차가 그리운 걸까. 아니면 사람이 그리운 걸까. 어르신은 무연히 앞산을 한번 바라보더니 담배를 꺼내 문다.
기차는 쌀이고 보리만 싣고 떠나지 않았다.
문정희 시인 생가
보성의 삼베와 꼬막도 순천의 쌀과 미역도 싣고 광주로 부산으로 서울로 오갔다. 그 칸에 실려 어린 문정희 시인도 광주 서석초등학교로 꿈을 안고 갔고, 그곳에서 전국 어린이 글짓기 대회에서 당선되어 천재 시인이 나왔다고 광주가 떠들썩거렸다. 보성의 봉황이 드디어 때를 만난 것이다.
그리고 그 봉황은 서울과 뉴욕으로 오가며 시에 매달렸고, 그의 시는 한국 대표 문예지는 물론이고 교과서에 대학 수학능력시험 문제에 수차례 출제됐으며 그는 우리나라 각종 문학상을 휩쓸고, 한번 날갯짓으로 3천 리를 간다는 봉황처럼 세계 방방곡곡으로 뻗어나갔다.
영동대로 경기고등학교 옆 '문정희 시인 길'은 조붓하지만 오붓한 맛이 난다. 명봉역은 아니지만, 꼭 두 마리 봉황이 어우러진 마을같이 갈서거니 못서거니 걷기 맞춤인 길이다.
녹슨 명봉역
살아 있다는 것은 암각화를 새기는 것이다/ 그것이 대단한 창조인 양 눈이 머는 것이다/ 바람에 온몸을 부딪치며/ 쉬지 않고 바위에게 흰 손을 내미는 것이다/ 할랑이는 지느러미가 되는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中
사시사철 엉겅퀴처럼/ 푸르죽죽하던 옥례 엄마는/ 곡을 팔고 다니던 곡비였다/ 이 세상 가장 슬픈 사람들의 울음/ 천지가 진동하게 대신 울어 주고/ 그네 울음에 꺼져버린 땅 밑으로/ 떨어지는 무수한 별똥별/ 주워 먹고 살았다 -'곡비' 中
명봉역의 쇠락도 우리 인생을 무척 닮았다. 기울어 가는 노송과 허물어진 시골집 녹슨 대문과 방앗간, 폐역을 보는 일은 늙은 어머니를 보는 것처럼 보는 것만으로 애처롭고 쓸쓸하다.
텅 빈 명봉역을 혼자 독차지하는 이 호사스러운 외로움, 혹시나 여기 정차한다면 하행선이든 상행선이든 기꺼이 몸을 맡기리라. 더 이상 이 고요가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혹여 저 우주나 저 피안으로 나를 데려갈지라도 서슴없이 나는 승차하리라.
명봉역
시인은 이 기차를 바라보고, 혹은 이 기차를 타는 꿈으로, 아니 이 기차를 타고서 은하철도 999 만화영화 주인공처럼, 수많은 꿈을 지면 위에 그렸으리라. 그의 시는 어쩜 이 명봉역이 썼거나 이 기차가 작가인지 모른다.
명봉에 이르렀으니 나 역시 몇 글자를 파종하리라. 봉황이 울고 비가 오고 눈이 오면 내 글자들이 꿈틀꿈틀 시가 될지도 모른다. 부디 당신도 이곳을 지나거든 봉황의 울음소리가 어떻게 나는지 들어보시라. 바다와 기차와 봉황과 마을과 사람들, 명봉역은 그렇게 누구나 시인이 되고 누구나 지상과 천상으로 오가는 꿈이 만나는 간이역이다.
창문 좀 열어 봐/ 첫눈이 온다/ 순간 전화기 저쪽에서 터뜨리는/ 절규가 허공을 뚫는다/ "지금 시아버지 입관 중"/ 쾅쾅 못질 소리 들린다/ 그 후 첫눈은/ 못질 소리로 온다/ 너와 나 사이/ 허공과 흙 사이/ 한 사람이 떠나고/ 또 한 사람이 떠난다./ 실존과 실존 사이/ 빙벽 같은/ 고독이 쌓인다 /못질 소리가 쌓인다/ 참다 참다 내리는 첫눈은/ 빙하기의 도래를 예고하며/ 못질 소리로/ 빗살무늬로 쾅쾅쾅 내린다. -문정희 作 '첫눈은 못질 소리로' 박용수 시민전문기자
박용수는 화순 운주사가 있는 곳에서 태어났다. 전남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줄곧 수필 쓰기만 고집해 왔다. ‘아버지의 배코’로 등단하여, 광주문학상, 화순문학상, 광주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하였다. 광주동신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며, 작품으로 꿈꾸는 와불, 사팔뜨기의 사랑, 나를 사랑할 시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