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발표 수필

무등산 지명에 그려진 세계, 유토피아

무등산 지명에 그려진 세계, 유토피아
박 용 수


지치고 힘에 겨울 때면, 누구나 쉬고 싶고 위로 받을 수 있는 곳을 떠올린다. 어머니와 아버지, 고향이 그렇다. 그렇지만 실존하지 않으시거나 부모님이 없는 고향은 고향으로써의 의미가 상당히 퇴색되고 쓸쓸함만 더할 뿐이다. 혹여 부모님이 계신 고향일지라도 실행에 옮기기까지 망설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 난감한 순간, 고개를 들어본다. 그러면 멀지 않는 곳에 시선이 박힌다. 바로 무등산이다.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 무등산은 넓은 치맛자락 같은 능선을 펼치며 내게 먼저 다가온다.
무등산은 그 어떤 산과 달리 사람을 좋아하는 산이다. 사람이 산을 좋아하기보다 사람을 더 좋아하는 산은 무등산뿐이다. 그래서 무등산은 늘 사람 곁에 있고, 산을 끼고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산처럼 맑고 깨끗하다. 그런 무등은 응당 여럿이 걸으면 더욱 좋고, 혼자 걸어도 즐겁지 않겠는가.

무등산을 거닐다보면 친근한 지명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늦재, 토끼등, 바람재이다. 젊은 나무꾼이 나뭇짐을 한 짐 지고서 토끼 등처럼 굽이진 길을 걷노라면 땀이 송골송골 맺혔을 것 같고, 그 즈음 바람재에서 시원스런 바람 한 줄금 불어주지 않을까. 땀을 식히고 잠시 쉰다는 것이 시간이 훌쩍 지나서 늦재는 귀갓길을 늦추는 고개가 되지 않았을까.
무등산 지명은 그 이름 하나하나에도 선조들의 애교가 물씬 묻어난다. 보성 꼬막이라도 먹어야할 듯한 꼬막재, 아무리 작은 고개라고 치더라도 꼬막만큼이야 하겠는가. 그 과장에 웃음이 절로 난다. 까까머리 동자승의 둥그스름한 머리가 떠오르는 중머리재, 꾀가 많은 김덕령(金德齡, 1567~1596) 장군이 자주 다닌 고개 꾀재 또한 미소가 절로 나오는 재치 있는 이름들이다.
무등산에 가장 많은 지명은 동물들의 이름을 붙인 것들이다. 용산들의 기름진 논밭에 풍년이 드니 작은 쥐가 드나들고, 고양이는 농부들의 노고를 지키느라 귀를 쫑긋 새우고 망을 보지 않았을까. 그래서 광주대에서 용산동으로 넘어오는 길에 작은 산이 쥐봉이고 그 봉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산은 괭이봉이 아닐까. 쥐와 고양이를 또 다른 경지에서 내려다보는 용연동의 매봉은 어떤가. 무등산은 그렇게 동물들이 노니는 모습이 그려지는 곳이다. 낙타 등처럼 생긴 낙타봉, 누에머리처럼 보이는 누에봉, 억새의 장관을 이룬 백마능선, 무등산 중턱에는 마치 동물원을 만들어 놓은 듯한 동물 낙원이다.
어디 동물뿐인가. 김덕령 장군의 전설이 곳곳에 스며있는 취가정, 풍암정, 제철소가 있으며, 우뚝 우뚝 솟아있는 봉우리들을 보면 원효대사의 이야기가 서린 원효봉, 윤황(1571-1639)이 쓴 글이 바위에 새겨져있는 윤필봉, 장원급제한 사람이 많이 나온 마을에 있는 장원봉. 그리고 군왕봉 의상봉 등 고승대덕과 관련된 지명도 적지 않다.
무등산 봉우리와 골짜기는 수많은 동물들과 인간이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세상, 고단한 세상 인간이 꿈꾸는 Nowhere, 유토피아가 아닐까.
산봉우리조차 평평한 평두메에 오를 즈음이면 시름과 근심은 절로 평온과 행복으로 바뀌고, 갈등과 번민 또한 절로 사라지고 내면으로부터 자유로움이 솟아나니 이곳보다 더한 신세계가 어디 있겠는가.

무등산의 세계는 여기가 끝이 아니다. 몇 걸음 더 옮기면 입석대와 서석대 광석대가 지상과 천상을 연결시켜주는 돌기둥처럼 우뚝 솟아있다. 이들이 떠받치고 있는 세계는 지금까지와는 분명 차원이 다른 세상이다. 천왕봉, 지왕봉, 인왕봉, 하늘과 땅과 인간이 함께 어우러진 공존의 세계, 천지인의 우주이다. 이보다 더 조화로운 세상이 또 있을까. 생명과 무생명의 조화, 자연과 인간의 어울림을 지명으로 풀어놓은 곳, 만인의 유토피아, 그래서 무등이라는 이름이 제 격에 맞으면서도 한없이 높고 끝없이 빛나는 것은 아닐까.
지명은 생김새에서 따온 경우가 많고, 더러 전설로 인해 붙인 경우도 있다. 무등산은 아래쪽은 이런 지명과 더불어 서민들의 삶과 관련된 지명들로 넘쳐난다. 중턱은 인간과 동물이 어우러진 세계, 상류는 인간과 자연이 하나임을 나타내는 무등, 우주를 상징하는 지명이 피라미드 모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무등산으로 가는 것은 우주탐험의 시작이다. 그래서 나는 웃으며 오늘도 신발 끈을 맨다. 무등산은 현실에 실존하는 이상세계이다.

                                                                                                                        전남일보 발표작

'발표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필가 박용수 나를 사랑할 시간  (0) 2022.02.16
나를 사랑할 시간, 박용수  (0) 2021.10.06
가장 늦게 피는 꽃  (0) 2021.08.23
천 번째 첫사랑  (0) 2021.06.28
나를 사랑할 시간  (0) 2021.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