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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수필

나를 사랑할 시간

 

                                                                                                        게재 2016-12-26 15:00:00

 



 하루가 저물어 간다. 석양에 물든 자연과 황혼에 이른 삶은 아름답기보다 슬프다. 새들도 귀소를 서두르고, 어선들도 뱃고동을 울리며 귀가를 서두르고 있다.
 까치밥처럼 한 장 남은 달력이 앙상하다. 달력 밑에 우수수 쌓인 숫자들을 밟으며 나날이 걸어온 삶을 뒤돌아보는데 누구라도 아쉬움이 많을 것이다. 삶은 충족보다 부족이고 완성보다 결핍이구나. 그것들도 바람 따라 여기저기 뒹굴다가 소멸되겠지. 긴 발자국이 찍힌 들판에 쌓인 눈도 봄바람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처럼 내 삶도 시간 속에 소멸될 것이다.
 경복궁 궁궐을 지날 때, 한없이 가볍고 더없이 천박한 여자에게 수백만의 백성들이 촛불을 들어, 퇴진하라 하야하라고는 사람들의 무거운 함성들도 깨끗해진 광화문 거리만큼이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이 찍어 놓은 분노의 발자국 위로 여러 국가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 인종 전시관이라도 되는 듯이 수많은 관광객들의 어지러운 발자국들이 분주히 덥고 있었다.
 그와 그들이 선택한 추악한 행위보다 더 얄밉고 더 화를 돋게 한 것은 뻔뻔스럽고 뻔뻔스럽다 못해 야비하게 뻔뻔스러운 뻔뻔스러움이 아니던가. 진실을 덮고 또 덮으려는 거짓들, 아 그들은 국가도 백성도 사랑하지 않는구나. 그래서 우리는 행복할 수 없었던 백성이었구나. 어느 해보다도 복잡한 아니 광주로 돌아오는 뜨거운 지금, 나는 나를 잠시 위로한다. 잠시나마 시간을 내어 나와 마주선다.
 삶을 힘들게 하는 것은 커다란 불행만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하루하루 행복하지 않은 일상이 쌓여가는 것일 것이다. 한 달을 결정하고 하루를 계획해야하는 시간들, 사회와 나 직장과 가족 그리고 가족과 나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던 나 나름의 고뇌들. 그 결정을 결심하기까지 나 나름의 흔들림들. 고흐처럼이야 아니지만 내 영혼을 풍성하게 해 준 가난과 또 그런 물적 세상과 치열하게 대결해왔던 내 내면의 각오와 다짐. 쿠르베인양 허상보다 현실을 위해 소신껏 싸워온 나날들. 때론 소주에 취해 비틀거리다 이마도 찧고, 밤늦은 한길에서 흔들거리며 눈물 흘리며 귀가도 하면서, 흐트러진 모습으로 살아온 때도 없지 않지만 그래도 올 한해는 또 나를 특별히 병상에 눕히지 않았으니 내 육체에 고맙고, 하루하루 가열차게 살아온 내 영혼에 감사하고 그래서 지금은 행복하다.
 벌써 내 머리 위에도 하얗게 단풍이 들었다. 벌써 두 번째 사춘기를 맞이한 것이다. 첫 번째가 흔들리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호수처럼 잔잔하게 맞이해야 할 것이다. 세상을 향한 선전포고였다면 이제 나 자신을 향한 조용한 속삭임이어야할 것이다. 올려놓은 무거운 것들을 내려서 가볍게 하는 그래서 누구나 처음에는 서툴렀던 것처럼 이젠 능숙하게 아주 전문가답게 나를 탐색하고, 얼마 남지 않는 주어진 시간 동안, 나를 사랑할 것이다.
 관계에 소홀할까 보아 몸부림치고, 소외되지 않기 위해 납작 엎드려 살아온 날들을 돌아본다. 소신껏 살기보다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눈치보고 살아온 비루한 시간들도 돌아본다. 나와 가족을 핑계로 정작 허깨비로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국가와 민족, 사회와 같은 거대한 담론을 이야기 하지 않더라도 직장과 동료 조직 운운하며 나를 왕따 시키지 않았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늘 많은 자와 비교되고 늘 행복한 자와 견주는 나는 이 얼마나 피곤한 존재였던가.
 이제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 단 며칠이나마 우적우적 걷고, 호탕하게 웃을 것이다, 숨 쉬는 일에도 만족하고 뻔뻔스러움에 대해서도 실컷 악을 쓸 것이다. 껍데기를 던져버리고 가짜 나가 아닌 진짜 내가 왕이 되는 시간이다. 나를 스스로 황제처럼 모시고 경배할 것이다. 12월의 마지막 시간, 지금은 최고의 행복한 순간, 12월 순간은 나를 사랑할 시간, 나를 위로할 시간이다.
                                                                                                                                                                박용수 광주동신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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