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만 천 번째
박 용 수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그녀 목소리는 상기되어 있었다. “너 바람둥이였어.” 그녀 말이 너무 황당해서 그 이유를 묻자, “너의 첫사랑이 나 아니었느냐.”며 당차게 말끝을 올린다.
무슨 일이냐고 되묻기도 전에 그녀는 이웃 마을 친구가 “걔는 첫사랑이 나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무슨 말이냐.”고 우기더란다. 그러면서 그녀는 너의 첫사랑이 나 말고 도대체 몇 명이냐며 따지듯 언성을 높였다.
50년이 지나도 식지 않은 첫사랑. 나는 그녀가 아직도 유년의 풋풋한 기억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누군가의 첫사랑이 자기였다는 것보다 뿌듯하고 더 가슴 설레는 일이 어디 있던가.
우리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고 그리고 내 첫사랑이 꼭 너만이 아니었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그녀 몽상은 오래도록 간직해도 나쁘지 않은 추억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친구와 직업, 사랑에 대한 성장통을 겪고 자란다. 나도 그랬다. 우정과 진로는 그럭저럭 알 것 같은데. 엄두가 나지 않게 센 놈이 사랑이었다. 어머니와 결별하고 제일 먼저 이웃집 아이를 좋아했다. 그리고 이웃 마을, 그다음은 읍내 아이였다. 도시로 진학을 하면서 사랑의 지평도 넓어졌다. 특히 이성에 대한 호기심은 순수함이나 발랄함 같은 외모에서 벗어나 그 아이 내면 중심으로 더욱 넓어지고 깊어졌다. 하지만 그럴수록 사랑은 더 심오했고 더욱 알 수 없었다.
일상이 늘 신비로운 탐험이다. 자연이든 인간이든, 새로운 세상과 매일매일 만나는 것이 삶이리라. 비행선을 타고 우주를 탐험하듯 신비로운 인간, 아니 개성 넘치는 인간을 탐험하는 것이 인생이지 싶다. 어떤 이는 구경하고 어떤 이는 탐색하고 또 어떤 이는 부딪혀 본다. 나는 누구를 가리지 않고 가능한 세 번째 길을 택했던 것 같다.
삶이 탐험이라면 이왕 자연보다 사랑을 찾아 나서는 게 좋겠다고 여겼다. 수많은 사람이 작달비처럼 지나갔듯, 수많은 사랑도 소낙비처럼 나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탐색이 끝났을 때, 조금이나마 그에 대한 연민이 남는다면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여겼다. 사랑의 무게는 오직 마음의 저울로만 잴 수 있었다. 진실해, 꿋꿋해, 따뜻해.
내가 우주를 여행하는 지금, 나에게 동력이 되고 에너지가 되어 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검은 바다에 신비롭게 빛나는 별이자 섬, 호기심이 있어서 나는 암흑의 바다를 헤쳐나갈 수 있었다. 넓은 바다에 떠서 제 고유의 색채를 지닌 섬, 푸른 별 노란 별 반짝반짝 빛나는 그 별이 바로 각기의 사람이고 그 사람의 사랑이 가슴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그러니 하나하나 만나는 사람마다 각각의 색채를 가진 별이고 섬이며, 그 별과 섬들을 사랑하는 것 또한 언제나 첫사랑일 수밖에 없었다. 매번 첫사랑이고 매번 설렘이었다. 두 번째 서른을 코앞에 둔 난 지금껏 오백 번 정도 그런 빛나는 별을 만났던 것 같다.
매 학기 초, 새 교실에 가득 앉아있는 친구 별들을 호기심 가득 바라보았다. 또 어떤 선생님인지 알고자 했다. 어느 별은 쉽게 자신을 보여주었지만 어떤 별은 꼭꼭 숨기고서 학년이 끝나도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또 새 학년이 되었고 그렇게 더 높은 우주를 탐험하면서 나는 조금씩 더 성장했다. 사랑도 그랬다. 처음엔 이성 간에 사랑만 사랑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넓은 우주로 항해할수록 가족 간의 사랑, 친구를 위하는 마음, 이웃과 인류를 위한 사랑이 중요함을 느꼈다. 나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고 타인을 위해 손톱만큼이나마 헌신할 수 있었다면 그 힘은 오직 첫사랑이었다. 묘하게도 사랑은 퍼줄수록 많아졌고, 세월이 지날수록 젊고 예뻐졌다.
그런데도 가도 가도 도달할 수 없는 세계가 인간이라는 각각의 행성이었다. 인간이라는 별 하나하나가 거대한 우주이자 블랙홀이었다. 그러니 내 첫사랑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언젠가 그녀를 만난다면 그녀는 자기만이 첫사랑이라고 명토 박으려 할지 모른다. 사랑은 명사가 아닌 동사라고, 아직 출발도 못 한 우주여행이 오백 번, 시작조차 안 한 첫사랑이 오백 번이나 남았다고, 그녀에게 당당히 말해 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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