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림 연가
By 편집에디터
게재 2020-11-04 15: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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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수 광주동신고 교사
늦은 오후. 각화저수지를 지나 뒷산을 오른다. 숲에 들어서면 정신부터 맑아진다. 초목이 건네는 맑고 향기로운 인사, 산이 준 선물이다.
오솔길로 접어드는데, 산굽이에서 여인이 앞서가고 있다. 딱히 바쁜 것도 없는데, 여인을 앞지른다. 작은 배낭에 보랏빛 모자가 앙증맞다. 경쾌한 음악이 지나가고, 향긋한 들꽃 내음도 지나간다. 눌러쓴 모자와 마스크 사이로 보이는 여인의 눈매가 곱다. 북천 저편 먹장구름이 제법 짙다.
음악과 들꽃이라니, 문득 초등학교 짝이 떠오른다. 들꽃과 경쾌한 음악 듣기를 좋아했던 아이. 간혹 들꽃을 보면, 꺾어서 내게 주곤 했다. 중학교를 마치고 그 애는 취업을 위해 서울로 떠났고, 진학을 위해 난 인근 도회지로 향했다.
그리고 10여 년 후, 유격 훈련을 받던 어느 날, 해가 기웃해질 무렵, 누가 면회를 왔단다. 궁금했는데 뜻밖에 그 애였다. 내가 총을 든 사내가 된 것처럼, 꽃 한 묶음을 들고 있는 그녀에게도 성숙미가 뭉클 풍겨왔다.
선임 하사는 외박증을 내주며 야릇하게 웃었다. 최전방이어서 읍내에 도착했을 때는 막차는 출발하고 없었다. 산중이라 금방 밤이 되었다. 딱히 할 일이 없어 여관을 잡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그녀도 주춤주춤 내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왔다.
땀을 식힐 겸 바위에 앉아 무심코 뒤를 보니, 저만치서 여인이 산을 오르고 있다. 자세히 보니 얼마 전 추월했던 아낙이다. 응당 보이지 않아야 할 터인데, 이쯤 되면 여인이 속도를 냈다는 말이다. 산에 오르는 이가 상념에 빠져있다는 게 우스웠다.
어쩜 내가 무서워서 그럴지 모른다. 산에서 남정네는 아낙에게 위험한 존재 아닌가. 부러 걸음을 재촉한다. 그런데 이런 어느새 또 여인네도 내 등 뒤에 붙는다. 재빨리 덤불에 몸을 숨겨본다. 과녁을 찾듯 여인은 고개를 빼 들고 두리번거린다. 순간 모든 신경이 곧추선다. 분명 나는 지금 그녀 사냥감이다. 신나는 일이다.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붉은색 등산복이 잘 어울리는 아담한 자태에 눈빛이 고운 사냥꾼이라니.
그런데 하필 잿마루이다. 호흡을 정돈하고 몸을 좀 풀고, 고개를 돌려보니 언제 올라왔는지 그 여인도 재빼기 저편에서 몸을 풀고 있다. 슬쩍슬쩍 고개를 내밀고 그녀를 바라본다. 아무도 없는 산마루에서 단둘이라니! 아무래도 남정네 눈길이 두려울 것이다. 해찰하듯 바라보는 서석대에서 장불재로 이어지는 능선이 붉디 곱다. 내 마음도 덩달아 붉어진다.
그런데, 갑자기 머리 위로 무언가가 후드득 떨어진다. 비다. 금당산 쪽에서 몰아치는 산돌림이다. 우비를 꺼내고서 그녀 쪽을 보는데, 여인네가 없다. 이럴 수가, 아래를 바라보니 무엇에 쫓긴 듯 여인은 혼쭐을 놓고 산에서 내려간다. 아차! 하고 나도 덩달아 하산을 한다. 여인의 걸음이 재바르다. 어느새 시선을 벗어나 버린다.
소낙비 동생이 산돌림이다. 비는 금방 멎었고 다시 주변은 환해진다. 버스정류장에는 몇 사람이 서성인다. 그 속에 그녀가 어느 노파와 이야기 중이다. 난 몇 사람 뒤에 서서 그들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1주일째 기다렸는데, 오늘 만났어요."
"일이 잘 안된 모양인데."
"예, 무슨 일이 있는지 먼 산만 바라보는 거예요."
"이런! 어찌 되었건 말을 붙여보지?"
"그러려는데, 이놈의 비가…. 아니 절 몰라보더라고요"
"그리 얼굴을 가렸으니 알아보겠니?"
"노래와 꽃향기면 알아볼 줄 알았어요."
버스가 도착하자 노파가 먼저 오르고 여인이 뒤따른다. 음악이 꺼지고 차에 오르는 여인의 손에 쥐고 있던 들꽃이 승차장에 떨어져 있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 사이 버스가 저 멀리 떠나간다. 그래 그녀다. 언제나 그녀는 꽃을 들고 있었다. 첩보 영화의 여주인공처럼 생긴 마타리꽃 같은, 두꺼운 입술에 붉디붉은 립스틱, 금방 상대의 가슴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 것 같은 고혹적인 자태, 날렵한 눈매와 뜨거운 몸짓, …
몇 해 전,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명함을 주며 반겼다. 점심을 먹고 산책도 하고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그녀는 떠나면서 내 등 뒤로 한 마디를 남겼다.
"곧 시집갈지 몰라!"
그러는 그녀는 "왜 그때 나를 가만 놔뒀어." 하며 따지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녀와 나는 늘 엇갈렸다. 비는 내렸지만 늘 나를 적시지 못했고, 그 비에 젖기를 바라면서도 나 역시 피해 다녔다. 그녀가 다가올 때 나는 우산을 썼고, 내가 그 비를 맞고 싶을 때, 산돌림은 이미 지나간 뒤였다. 엇나간 인연, 비껴만 가는 운명, 그것도 사랑일까.
나는 우두커니 정류장에 서 있었다. 몇 대의 버스가 지나가고 또 지나가도 내가 승차장 표지판처럼 서 있었다. 곧 시집갈지 몰라! 난 그때 그 말의 행간을 읽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가 퍼뜩 떠올랐다.
"그래? 그것도 몰라, 면회 갔을 때처럼, 네 인연이 아닌가 보다."
"예 그래요. 사람을 무안하게 했어요. 세 번씩이나, 다른 사람을 찾아봐야겠어요."
그날 밤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집간다는데 붙잡을 수도 없었다. 내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는 말인가.
버스는 아스라이 언덕을 넘어가고 있다.